오늘의 정치, 드라마가 되다. – 대구일보

오늘의 정치, 드라마가 되다. – 대구일보나이든 까닭일까. 어느새 드라마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과의 감정이입을 통해 분노와 슬픔을 자아낸다. 서사적 구조를 가진 드라마의 특성상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흔한 대중적 삶을 전달하는 이야기 방식과 개연성을 지닌 극적 전개는 ‘몰입을 통한 동일성’의 과정을 겪는다. 드라마가 “인간 행위를 모방한다는 의미”인 고대 그리스어로부터 유래했다는 말에 무게가 실리는 지점이다. 미디어의 발전은 다양한 ‘볼거리’와 기존 드라마의 영역의 확장성을 불러왔다. IT 기술을 통한 정보통신기기의 발전은 시간과 공간적 한계성을 뛰어넘고 있다. 공중파 방송에 한정되던 시대에서 다양한 종합편성채널과 OTT 플랫폼으로 발전해 왔다. ‘권선징악’의 결말로 끝나던 드라마는 ‘열린’ 결말을 통해 판단은 시청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연속성을 지닌 시리즈물의 경우 후속작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시대적 흐름에 따른 정치판의 대중화인지 어느새 우리 정치는 드라마와 구분하기 어렵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닮은 모양새다. 지지층의 감동과 눈물을 위해 과도한 액션을 마다하지 않는다. 무리한 극적 전개임을 알면서도 ‘사이다’란 찬사를 위해 사실확인 없는 예고편을 던지고 있다. 시청률이 드라마의 성패를 결정하듯 매주 발표되는 여론조사에 일비일희하고 있다. 자신이 던진 말들이 채 잊히기도 전에 번복된 말들로 당위성을 만들고 있다. 가짜 뉴스란 말을 이만큼 난발한 적 있었던가 싶다. 분명 진실은 존재함에도 어느 쪽이 진짜인지 구분조차 어렵다.

한때 드라마의 결말을 시청자가 결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물며 극 중 배우의 역할과 죽음마저 결정하기도 했다. 그것은 시청자들이 꿈꾸는 삶이었고 간절한 바람이었기에 가능했다. 판에 박힌 대화나 줄거리라 하더라도 비난의 대상은 아니었다. 악인의 결말은 징벌적 삶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최근 쏟아지는 드라마의 형태와 그 결말은 다양하다. 시공을 넘나드는 판타지 드라마와 정체불명의 ‘좀비’ 드라마는 인과성과 개연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마치 어느 날 문득 ‘어젠다(agenda)’없이 던져진 정치적 이슈와 같다. ‘무엇을 위해’라는 명분은 일치한다. 사랑의 완성과 생존이 드라마의 명분이 되듯 국민을 위한 충심이라는 정치적 논리가 작용한다. 하지만 과정의 합리성과 예측 가능성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일방적인 수용과 이해를 강요한다. 몰두해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겨우 이 정도였어’란 결말 앞에 허무함만 밀려온다. 극성 지지층은 그나마 낫다. 믿고 따르는 작가의 이름을 믿듯이 자신의 신념을 내세우며 진영논리 속에 안주하면 되니 말이다.

용비어천가와 관련된 드라마가 끊이지 않고 방영된 적 있었다. 역사를 기반으로 한 역사 드라마이자 시리즈물이었다. 왕권을 둘러싼 권력 투쟁의 서사와 감초처럼 전개되는 러브스토리는 시청자들을 안방으로 불러 모았다. 역사적 사실의 진실과 허위의 아찔한 경계선에서 그저 인간이 갖는 본연의 욕망을 자극하면 시청률은 보장되었다. 역사적 지식의 많고 적음은 드라마에 대한 이해도에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배우의 발음 혹은 전달력보다 중요한 것은 눈물과 분노를 자아내는 연기가 중요했다.

흔히 특정 정치인이나 정책에 대해 과도하게 찬성하거나 찬사를 보내는 일을 ‘용비어천가’라 부른다. 조선왕조의 건국을 찬양하고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찬양한 책이기에 비꼬기의 대상이 된 것 같다. 오늘의 우리 정치는 이 비유로부터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여론조사와 감성에 좌우되는 한국 정치의 현주소는 한 편의 드라마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과도한 몸짓으로 연기하는 정치인만 남아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김 시 욱(에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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